체육, 어문 두 번의 전공 선택 실패, 그리고 개발자가 되기까지

Posted by devfon on May 7, 2023

2019년 대학에서 졸업한 후, 어느덧 사회에 나온지 4년차 개발자가 되었다.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시피 굳이 상투적인 표현으로 “돌이켜보면” 이라는 표현을 붙이지 않아도 개발자라는 직업에 정착하기 까지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한번 쯤은 지나온 내 인생을 정리하고, 이야기를 공개적인 공간에 정리해두고 싶어 글을 남겨본다.


한국판 제리 맥과이어를 꿈꾸던 소년

어릴 적 나는 스포츠에 완전히 푹 빠져 살았다. 매주 주말 새벽은 축구 시청으로 밤을 지새웠고, 용돈을 모아 축구 잡지 FourFourTwo, BestEleven 등을 잔뜩 모아 책장을 가득 채우며 풍족함을 느꼈다. 그리고 축구선수 브로마이드를 모아 방을 뒤덮어 항상 혼나기 일쑤였다.

그 중에서도 아직까지 또렷하게 기억 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수학 과외를 받던 중 과외 선생님에게 유학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은 적이 있다. 축구에 너무나도 미쳐있던 나머지 영국에서 유학을 하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아 영국 유학 고민을 했었더랬다.

당시 진지하게 부모님과의 상의도 이루어졌지만, 실제로 유학 길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때 정말 유학을 갔었더라면 또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겠지? 아무튼 중학교 무렵의 나는 그 정도로 스포츠에 진심이었다.

그렇게 아주 자연스레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는 스포츠를 업으로 삼을 수 있는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를 가장 사로잡은 직업은 스포츠 에이전트였다. 우연히 접하게 된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서 톰 크루즈가 분한 제리의 인생이 너무나도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스포츠로 사업을 한다니!

당시만 해도 스포츠 에이전트라는 직업은 국내에서 매우 생소한 편에 속했다 (사실 아직까지도 관련 시장이 엄청나게 활발하지는 않은 듯 하다). 그래서 관련 정보를 찾기 굉장히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어찌 저찌 찾은 자료들을 종합해보니 스포츠 에이전트가 되기 위해서는 경영학, 법학, 스포츠 산업 등의 전공을 하는게 유리하다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위 결론에서도 여러 진로를 설정할 수 있겠지만, 나는 스포츠를 전공으로 하고 사회에 나와 스포츠 에이전트가 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체육”을 전공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여담으로 당시 쪼호형으로 유명한 김동완 해설위원의 싸이월드에 무작정 찾아가 “스포츠 에이전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에 대한 질문을 방명록에 남긴 적이 있다. 남긴지 한참이 지나도 답변이 안달리길래 “역시 이런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겠다”하고 기억에서 지우게 되었을 무렵 김동완 해설위원이 댓글을 달아주었다. 여러 메시지가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스포츠 에이전트 너무 힘드니 하지 마세요…“

성인이 된 지금 다시 생각해도 바쁜 시간을 쪼개어 얼굴도 모르는 중학생의 질문에 답변을 달아주신 점이 너무 감사하다. 그래서 아직도 김동완 해설위원이 맡은 경기를 볼 때면 그 때 생각이 나 마음이 훈훈해진다.


첫 번째 좌절: 자기기만

그렇게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뒤, 20살 서울 소재 대학 체육교육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체육교육과에 진학해 가장 아쉬웠던 점은 대부분의 네트워크가 임용고시를 목표로 하는 주변인들로 구성되어 있어 내가 원하는 스포츠 산업 관련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2013년 스포츠잡 알리오에 남긴 귀여운 자기소개

이러한 환경적 제약을 타개하고자 스포츠잡 알리오라는 카페에서 주최하는 여러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고, 스포츠경영관리사 자격증 공부를 개인적으로 챙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무렵 무언가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원한다고 생각한 진로를 준비하고, 관련 공부를 이어 나가는데 도통 흥미나 열정 따위가 생기지 않았다. 무언가 나를 둘러싼 세계가 꽉 막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응어리를 전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스포츠 마케팅을 전문으로 다루는 대학생 연합 동아리에 지원해 면접을 보러 가던 날이었다. 당시 서강대학교에서 면접이 진행되었는데, 면접 장소로 가는 길에 동아리 관련 포스터길 안내도 그리고 면접 준비로 모인 학회원들이 내 시야에 계속해서 밟혔다.

학회원들과 완성도 높은 포스터 등을 보며 내 머리에 미친 생각은 “나는 이 사람들처럼 스포츠를 일로써 사랑할 자신이 없다” 였다. 나는 스포츠를 소비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를 업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결국 근처 벤치에서 면접에 불참해야할 것 같다는 메시지를 전송하고, 조금 쉬다가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후 내 인생에 대한 중간 점검을 위해 군대에 입대하기로 결심한다.


두 번째 좌절: Olá!

문단 제목을 두 번째 좌절로 적었지만, 사실 두 번째는 첫 번째 만큼 큰 좌절은 아니다. 계획 상으로는 군대에서 인생에 대한 점검을 했어야 하지만, 인생에 대한 고민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적응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나는 군대를 카투사로 입대하게 되었는데 가장 큰 결점은 영어를 너무나도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영어 실력을 키우고자 동두천 전투병으로 자원을 하게 되었다. 전투병은 대략 한국군과 미군의 비율이 1:8 정도가 된다. 그래서 영어를 접할 기회가 많지만, 기회가 많다고 전부는 아니기에 적응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했어야 했다.

군대는 전역하는 그 날까지도 영어와의 싸움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카투사 덕분에 2년 간 영어 실력을 많이 향상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경험을 레버리지 삼아 편입학을 하기로 결심하게 됐다.

문제는 어떤 전공을 해야할지에 대한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기존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편입학을 결정했다는 점이다. 결국 깊은 고민을 하지 못한 채, 바운더리 안에서 사고를 하게 되었고 또 다시 스포츠 관련된 전공으로 여러 대학들에 지원하게 되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포르투갈어과에 진학하게 됐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왜 포르투갈어를 전공하셨어요?” 라는 질문을 한다. 포르투갈어 전공이라는 결정에는 스포츠라는 키워드를 끝끝내 버리지 못하고 중요한 결정을 한 미생의 내가 있다. 한국 축구 시장에는 브라질 출신 용병들이 많으니, 포르투갈어를 전공하면 또 다른 기회가 열릴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안일하게 했다. 결국 이 길도 택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글쓰기 과제로 당시 경남 FC에서 뛰던 말컹에게 보낸 메시지와 답장

그럼에도 포르투갈어 전공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대한민국에서의 외국어 학습에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해당 언어를 정말 잘 하는 사람들의 기준으로 설정된 상한이 있기에 항상 그들로 설정된 천장에 도달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초조함이 있다.

그러나 포르투갈어 학습은 언어가 생소하니 만큼 대부분의 학생들이 처음부터 학습하는 상황이었고, 그렇기에 노력으로 경쟁할 수 있다는 점이 내게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식민 지배를 한 포르투갈로 인해 형성된 포르투갈어권 국가들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며, 인문학적 소양을 넓힐 수 있었다는 점도 내겐 너무 좋은 경험이었다.

다만 포르투갈어 전공을 살려 무언가를 할 수 있겠다거나, 당초 (잘못한) 선택처럼 스포츠와 함께 살리고 싶은 생각도 크게 없었다. 그렇다면 방황하는 내가 내릴 수 있는 답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국민 복수전공 “경영학” 을 전공하는 것이다!


갑자기 분위기 소프트웨어 (?)

편입학 후 한 학기를 마치자마자 나는 복수전공을 해야 겠다는 결심을 내렸다. 처음에는 당연히 경영학을 전공해야지 생각했지만, 복수전공 신청 기간이 끝나기 5분 전 나는 난데 없이 소프트웨어로 복수전공 신청란을 변경했다.

복수전공 신청이 끝난 17시, “내가 뭘 한거지?” 라는 생각에 5분 정도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왜 나는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걸까?

여러 사소한 이유들을 붙여볼 수 있다. 먼저 다들 따르는, 당연하게 정해진 수순으로 보이는 길을 밟고 싶지 않았다. 내 인생에 대한 주도권이 내가 아닌 시스템에게 있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도 작용했다. 우리 집은 아주 작은 사업체를 운영했는데, 그 때문에 언젠가는 사업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으며 자랐다. 나도 사업을 한다는 것에 크게 닫힌 마음이 없었고, 21세기에 사업을 하려면 기술을 알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결정에 영향을 미치게 됐다.

그렇게 나는 갑작스러운 체육교육, 포르투갈어에 이은 소프트웨어를 세 번째 전공으로 이수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가끔 내 선택들이 재밌게 느껴져 스스로를 문이과 예체능 통합형 둔재라 부르고 있다.

이제부터는 개발자의 이야기이다.


“비전공자치곤 잘하네”의 함정

한국외국어대학교 소프트웨어 전공에는 특이한 요소가 하나 있다. 공과대학이 서울이 아닌 용인에 있어 학생들의 직접 이동이 어려우니, 컴퓨터공학과 교수님들이 직접 서울로 출강을 와주신다는 점이다. 이는 곧 전공 수업을 서울 캠퍼스 학생들끼리만 듣는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서울 캠퍼스는 문과 대학만 있는 곳이니 사실상 소프트웨어 수업을 “복수전공”하는 학생들끼리만 듣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해당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난생 처음 접한 컴퓨터공학을 전공생들과 경쟁하는게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과 대학에서 이루어진 수업은 비교적 수월하게 따라갈 수 있었다. 수월하다기 보다 문과 대학에서는 제일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딱히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크게 컴퓨터공학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략적으로 전체적인 분위기가 “우리가 공부한다고, 제 1 전공생보다 잘 할 수 있겠어?” 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러한 패배주의에 빠지고 싶지 않아 전공에 관심이 있고 열심히 하는 친구들과 스터디를 구성하고, 정기적으로 고민을 주고 받으며 학습에 더 몰두하고자 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이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나를 비롯해 모인 사람들이 모두 열심히는 하지만, 주전공이 아니다보니 상대적으로 취업 관련 정보나 준비해야 할 것들에 무지했다.

그래도 학교 수업에서는 곧잘 좋은 성적을 받았고, 전공 2년차 때는 컴퓨터공학 교수님으로부터 조교 제의를 받아 한 학기 수업 조교를 하며 용돈 벌이와 파인만 학습법을 함께 챙겨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전공 실력에 대한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절대 “비전공자치곤 잘하네” 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졸업 전 전공생들이 듣는 수업을 무작정 신청해 용인으로 등하교를 하며 내 실력을 가늠해보기로 했다. 당시 3학점 짜리 디자인 패턴 과목을 수강해, 주 2회 서울-용인을 오가며 전공생들과 내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결국 해당 과목에서 A+ 성적을 받으며, 스스로 가지고 있던 불안감을 다소 잠재울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비전공자치곤 잘한다”가 아니라 “전공생들과 견주어도 다 이길 수 있다”라는 목표로 학습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데에 있어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남들과는 다른 노력

졸업 직후에는 아주 작은 초기 스타트업에서 머신러닝 엔지니어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졸업을 하자마자 이문동 자취방에서 나와 일산 본가로 들어갔기에 강남역 공유 오피스에 있던 사무실까지는 도어 투 도어로 대략 2시간 가량이 걸렸다.

당시 이 시간이 너무나도 아깝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도 아깝긴 하다). 나는 버스 멀미가 심해 대부분의 이동을 지하철을 통해 하는데, 지하철에서는 학습할 수 있는 시간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무렵 나는 부족한 머신러닝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 논문 학습을 굉장히 많이 했었는데 내가 학습한 이력을 남기는 공간을 마련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해 내가 학습한 내용을 주기적으로 정리해 공유를 하기 시작했다. 페이지 운영의 효과는 다방면에서 크게 나타났다. 첫 번째로 학습 내용을 주기적으로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에 학습이 강제되었다. 일종의 학습을 위한 외부 동기를 마련한 셈이었다.

두 번째로 학부 시절부터 같은 필드에서 같은 고민을 하는 주변인들을 사귀고 싶다는 니즈를 훌륭하게 충족해주었다. 페이지 덕분에 정말 많은 업계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아직까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고민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한 분들이 많다.

세 번째로 외부 공유라는 제약 덕분에 공유를 위해 더 깊게 학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내가 잘못 이야기 한 정보를 받아보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참조 자료를 더 많이 찾아보게 되었고, 혹여나 잘못된 내용을 기재한 날에는 많은 분들이 교정을 해주셔서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을 수 있어 가파른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마지막으로 페이지를 운영함으로 인해 내 역량을 보다 쉽고 빠르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었다. 당시 페이지 운영을 통해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고, 이는 채용 제안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페이지를 통해 얻어진 인연으로 전 직장이었던 카카오브레인에 머신러닝 엔지니어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얻은 배움은 같은 노력의 양을 투입해도 산출되는 값의 크기와 질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열심히 노력하면 누군가 반드시 나를 알아준다”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아니 그전에 나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부터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따라서 개발자로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내공을 갈고 닦기 위한 노력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똑똑하게 알리기 위한 노력도 꼭 함께 챙기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다.


Connecting the dots

다소 진부할 수 있지만 나는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과거의 선택 중 어떠한 것들이 현재의 내 부분을 만들었을까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비교적 어린 나이부터 스스로의 인생을 결정하기 위한 고민을 많이 해왔다. 그 결과 체육을 전공하게 된 부분적 실패는 있지만, 스스로 건설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카투사로 병역을 해결한 덕분에 영어에 자신감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겠지만 영어 실력은 개발자 역량에 있어 꽤나(?) 비중이 있는 편이다.

페이지를 운영하며 얻은 업계 동향 파악과 이를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은 실제로 업무를 할 때 엄청나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는데, 나는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파악과 회사 외 업계 흐름을 파악하고 이를 정리해 팀에 공유해 가치를 창출하는데에 있어 큰 강점을 지니게 되었다.

결국에는 “Connecting the dots” 이다. 잡스가 이야기했듯, 우리가 살아가며 찍어나가는 점들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가지게 될지 당장은 알 수가 없다. 그저 내 인생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며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내가 찍어온 점들이 어떻게 합쳐지고 있는지, 혹은 합쳐질 수 있는지를 점검하며 지식경험으로 내재화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찍어나가는 점이 어떤 모양인지, 색이 너무 연한지는 않은지 등을 고민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을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내가 찍은 점들이 이어져 선으로 보이고 있을테니.


새로운 시작, 스타트업

카카오브레인에서 짧지만 밀도 있는 경험을 마친 후, 현재는 스타트업 라이너에서 머신러닝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다. 스타트업에 도전한 이유는 간단하다. 제품을 만들며 세상에 유의미한 변화를 내는데에 기여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정에 있어 내가 가진 기술이 이바지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직 후, 약 2년의 시간이 지났다. 스타트업, 정말 엄청나게 힘들다. 문제 정의부터 실행, 실행으로부터 얻은 배움 체화 그리고 또 다른 문제 해결의 반복이다. 그만큼 밀도 있는 성장을 할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을 땐 엄청나게 재밌다.

나라는 사람의 31년의 역사에서 나를 가장 단단하게 성장시켜준 시기는 이 2년의 시간이다. 그래서 지금 이 성장은 현재 진행형이다. 매일, 매주, 매달 나는 탈피를 통해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스타트업이 내게 매력적이면서도 동시에 힘든 이유는 내가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내가 정의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스타트업은 의지와 뜻을 가진 누군가 만들어 낸 이니셔티브의 총합으로 가치가 구성된다. 따라서 각자가 우리 조직에 필요한 것들에 대한 진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하고, 그 진단에 맞는 솔루션을 이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이 간혹 내가 영향력을 미쳐도 되는 혹은 미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모호함을 낳기도 하지만, 이 모호함을 이겨낸다면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을 챌린지로 치환해 업무에 임할 수 있게 된다. 엔지니어로서 응당 고민해야 할 기술적 챌린지 뿐만 아니라 팀 빌딩, 구성원 성장, 조직 문화, 제품 등 여러 방면에서 고민하고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2년 전, 1호 머신러닝 엔지니어로 입사해 현재는 4명이 기술적 고민에 같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그리고 구성원들의 성장안에 목소리를 많이 내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계획을 고민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추상적 레이어를 의지에 따라 마음껏 오갈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음에 감사하고, 그 덕분에 밀도 있는 성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며…

내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남기고 싶었던 이유는 다양하다. 먼저, 내 이야기를 통해 한 명이라도 더 도전에 있어 보다 열린 마음을 지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이다. 세상은 정해진 길을 걷는 사람들을 선호한다. 그래서 혹자는 본인이 가진 고민을 단순 방황으로 치부하고, 정해진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 고민을 지워버린다. 다른 혹자는 주변인들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당연하기도 하다. 정해진 길을 가는게 대개 성공 확률이 높은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교란종 이야기가 또 다른 교란종을 낳게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성공 방정식은 다르게 쓰여질 수 있다. 모두가 동일한 함수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갈 필요는 없다.

또 나같은 둔재도 나름의 노력을 통해 개발자로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누군가에게 위안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 나는 개발에는 일정 부분 적성과 재능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런데 그 적성과 재능은 20살에, 마침 그것도 컴퓨터공학과에 입학을 했었어야만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25살에 학교 컴퓨터실에서 난데 없이 소프트웨어를 전공하기로 마음 먹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개발에 재능이 있는지 평생 알 수도 없었을 거다. 세상에는 실제로 마주하지도 않아보고, “내가 뭐라고” 라는 생각에 도전을 회피하는 케이스가 너무나도 많다.

“어떤 요구사항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이제 적성과 재능을 찾을 수 있겠다”는 명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 적성을 찾은 많은 사람들은 제약사항 없이 탐색을 해왔기에 탐색을 거쳤던 분야에서 적성과 재능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잘못된 선택들로 꼬인 인생에 놓였던 나도 할 수 있었다면, 당신도 반드시 할 수 있다” 는 메시지를 꼭 전하고 싶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아름답게 수놓았던 점들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