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차이나는 클라스-ep.20] 인공지능! 친구인가? 적인가?

인공지능을 두려워 하는 이들을 위하여

Posted by devfon on October 5, 2017

“High-level reasoning requires very little computation, but low-level sensorimotor skills require enormous computational resources.”
<Moravec’s paradox>

인공지능! 친구인가? 적인가?

AI에 대한 호기로운 관심부터 인공지능 논쟁에 있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AI가 인간 삶에 미칠 부정적 영향까지. 사실 인공지능은 과거부터 꾸준히 우리의 관심을 받아온 기술 분야였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발전으로부터 더 나은 삶의 수준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편안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일자리를 잃게 되지는 않을까 우려해왔다. 그리고 작년, 딥마인드의 알파고가 이세돌에게서 ‘바둑’이라는 종목으로부터 승리를 따낸 이후 인공지능의 대한 관심은 ‘기대’보다는 ‘우려’에 맞추어졌다.

다시 한 번,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낯선 주제나 기술이 아니다. 우리는 아마존의 ‘Alexa’나 애플의 ‘Siri’ 등 선진화된 인공지능을 어디서나 쉽게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눈 여겨봐야할 점은 그러한 인공지능이 행할 수 있는 기능이 날로 다양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알람 설정, 특정 음악 재생 등 단순한 기능의 수행에 그쳤다면, 이제는 ‘Chatbot’과 같은 기술로 인간 수준의 대화를 행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목소리의 인식을 통해 상대방의 감정을 예측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그럼에도 현재 AI가 가진 부족한 부분은 대화를 함에 있어, 인간 수준의 ‘공감’ 능력을 가지고 상호작용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공감능력은 고등사고 중에서도 높은 사고력을 요하는 부분으로, 아직까지 AI에게서 인간 수준의 공감 능력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현재 AI는 목소리의 떨림 혹은 감정 변화에 따른 신체 변화 등으로 인간의 감정을 판단하고, 그렇게 분석된 Data를 통한 공감을 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인공지능은 Command와 Input에 대한 연산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졌기에, 그에 반하는 혹은 명령어로 산출될 수 있는 Output 보다 더 창의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정재승 교수를 비롯한 뇌과학자들의 비유에 따르자면 인공지능의 이러한 창의적 일탈이 일어날 확률은 ‘원숭이에게 아무렇지 않게 타자기를 두들기도록 했을 때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나올 확률'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가 우려하면서도 기대하고 있는 인공지능은 현재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하나의 ‘인격체’ 정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정확히 말하자면 딥마인드가) 작년 전 세계를 강타한 이유는 이처럼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바둑이라는 종목은 체스보다 고도의 사고를 필요로 할 뿐더러 경험과 직관 등 수치화될 수 없는 다양한 외부 요소가 승패에 작용한다고 한다. 따라서 인공지능 전문가들 조차 인공지능이 발전을 거듭하더라도 ‘바둑’이라는 종목에서 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응, 아니야>

그러나 인공지능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강화학습, 머신러닝, 딥러닝 등 나에겐 이름만 친숙한 다양한 분야가 발전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인공지능이 ‘바둑’의 최강자들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판 후이, 이세돌, 커제 등 다양한 정상급 기사들을 패전기사로 전락시키며 전 세계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이 여파는 특히나 우리나라에 크게 작용하여, 정부급 인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으로 귀결되었다.

(결국 코딩 의무교육의 시초는 알파고..)

이처럼 날로 발전하는 인공지능의 특성 상,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인격체와 같은 사고가 가능한 인공지능이 탄생할 것이라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제는 이러한 기술이 단순이 가능하다, 불가능하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이 정말로 탄생(생명이다, 정말로)했을 때 이후에 벌어질, 그리고 바뀌게 될 우리 사회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지냐는 것이다.

인공지능과의 사랑은 가능해질까?

영화 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지금으로서는 다소 상상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며,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이 정말로 가능한 것인가? 라는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사랑에 대한 본질적 질문, 인간이 인공지능과 달리하는 특성 등 관람객의 사고 정도에 따라 더 깊게 발생할 수 있는 난해한 질문들을 마구마구 쏟아낸다. 그리고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이 우리가 앞으로 다가올 인공지능을 맞이하기에 앞서 고민해봐야 할 밑그림의 거름이다.

인공지능과의 사랑, 내 일자리를 앗아갈 인공지능, 성적 분출구가 될 로봇 등.. 인공지능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에 대한 찬반양론은 다양한 주제로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사고를 단순한 논쟁거리로만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 끊임없이 이에 대해 고민하고, 의견을 공유하며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건강한 사고관을 확립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일자리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이기심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프로그래밍화된 인공지능이 본인들의 회계장부를 맡아주기를 원하게 되면, 회계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일자리가 위태로워 진다. 많은 사람들이 이전의 판례들을 모두 분석한 인공지능이 자신의 변호를 맡기를 원하게 되면, 변호사라는 직업이 위태로워 진다. 나는 편리해지고, 남은 위태로워진다. 그럼에도 본인의 직업에 대한 소멸만을 걱정한다고?

“인공지능과 사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가?”

사랑에는 한 가지 사랑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육체적 사랑만을 좇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속칭 Platonic Love이라 불리우는 정신적 사랑만을 좇는 사람 또한 존재한다. 인공지능과의 사랑은? 굳이 분류하자면 후자의 정신적 사랑이라고 분류할 수 있겠다. 물론 이후 기술적 발전과 더불어 현재 세계 각지에서 개발 중인 ‘섹스 토이’와 인공지능과의 결합을 통해 두 사랑 모두를 인공지능이 취할 수도 있고 말이다.

이렇게 된다면 인공지능은 두 가지 사랑을 모두 충족하게 된다.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문제는? 프로그램의 한 패널은 “인공지능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편이 될 것이다. 사랑은 일방향적 종속이 아닌 서로 간의 수평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라고 주장하였다. 일리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주장 또한 한 사람의 주장이기에 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앞으로 호의적 입장을 취했든, 부정적 입장을 취했든 우리는 인공지능의 발전을 계속해서 지켜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에 대한 무조건적 찬성, 무조건적 반대가 아닌 자신이 계속해서 견지할 수 있는 뚜렷한 사고를 확립하는 것이 다가올 미래를 맞이하여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하나의 예비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