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기억되는 사랑, 추억 그리고 가족 이야기. 우리는 음식을 통해 타인의 부재를 극복하는가 하면, 마음 속에 간직되던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루시앙의 가지처럼, 한 여인의 파스트라미 샌드위치처럼. 연극 ‘가지’는 음식이 이처럼 인생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신박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부재’의 키워드처럼 우리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부재를 인식해야 하는 날들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부재의 인식은 레이가 아버지의 사후 치과 검진 안내 전화를 받는 것과 같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찾아올 수도 있지만, 그 사람과 추억하던 어떠한 하나의 음식으로 그 부재를 인식하게 될 수도 있다. 레이는 루시앙의 가지 이야기 속에서 음식 속에 담긴 숨은 의미를 찾고, 아버지가 먹던 싸구려 라면을 기억해내며 그의 부재를 인식하고 추억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루시앙이 말하는 가지가 보편적으로 생각되는 ‘Eggplant’가 아닌 ‘Aubergine’이라는 점이다. 가지는 자고로 ‘Aubergine’으로 불러야 더 맛있다고 주장하는 그의 말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작품의 말미가 되면 우리는 그 의미를 서서히 이해하게 된다. 음식이란 차려주는 사람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이 진정 의미있게 베풀 수 있는 음식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코넬리아의 어머니가 Feeding의 욕심에서 그녀에게 좋아하지도 않는 각종 고급 요리들을 선사한 것이나, 레이가 프랑스 고급 요리를 그의 아버지에게 대접한 것은 진정한 의미의 ‘대접’이 되지 못한 것이다. 레이는 아버지의 사후 Aubergine에 담긴 의미를 깨닫게 되고, 루시앙에게 그의 본국 가지를 구해와 가지볶음밥을 해주며 그가 가진 부재를 잠시나마 메꿔주게 된다. 음식에 담긴 당사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레이가 마주보며 식사를 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여러 의미로 굉장히 좋게 다가왔다. 오랫동안 음식과 식사라는 단어에서 갈등을 빚어온 두 사람이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순간, 그들의 진정한 식사 시간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그들은 이제 거울에 갇힌 나 자신을 바라보며 죽음을 마주한 채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한 식사를 하게 된다. 비록 늦었지만서도. 가족과 음식, 그리고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좋은 작품.